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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 박지영, 김창대

#14.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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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왔다.

오늘 저녁, 석사 신입생 환영회가 있습니다.

6시에 ‘내동 생고기’[1]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학교에서 5시 40분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신입생은 이한길(26, 남), 서연정(24, 여) 두 명입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 하주성 드림

김정원(박4): 야, 벌써 신입생 들어왔냐?

옆자리의 국현에게 물었다.

김국현(박3): 오늘부터 배정이잖아요. 한 명 받네, 두 명 받네 하더니, 두 명 받았네요.

김정원(박4): 이제 박사 4년차 되니까, 통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진석[2]은 목록에 없다. 나랑 면담했던 그 학생은 어느 연구실로 갔을까? 인연이 아닌가 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고 그 때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날 원망하진 않겠지.

김국현(박3): 이번에 들어오는 여학생이 예쁘대요. 주성이가 그러던데.

김정원(박4): 어? 한 명은 여학생이네? 근데 주성인 어디서 봤대?

김국현(박3): 자기한테 연락을 해 와서 한 번 만났었대요.

김정원(박4): 그래? 그럼, 이제 보영이 안 외롭겠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보영이를 쳐다보았다.

전보영(석2): 뭐, 달라질 거 있나요.

시크하게 대답한다. 늘 그렇듯.

김정원(박4): 아, 그런가.

하긴, 1명이 2명 된다고, 소수가 다수가 되는 건 아니니까. 불편함은 그대로, 괜히 챙겨야 할 것 같은 부담만 더 하겠지. 좀 미안해졌다. 얘기를 돌렸다.

김정원(박4): 오늘은 또 얼마나 마시려나.

김국현(박3): 그러게요. 아, 할 거 많은데. 1차만 끝나고 들어오긴 무리겠죠?

김정원(박4): 그래도 명색이 신입생 환영횐데, 3차까진 가줘야 하지 않겠어?

김국현(박3): 아씨. 몇 시간 남았지? 후딱 해봐야겠다.

국현이가 모니터를 매섭게 쳐다보며 손을 움직인다.

현이는, 그래도 연구실에 새 구성원이 들어온 건데, 시간이 그렇게 아까운가?

시대가 바뀌고 있다. 공동의 목표보다 개인의 행복으로 우선순위가 옮겨가고 있다. 각 개인의 의사와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꽤 중요해졌고,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것은 과거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대한 반대급부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더 바뀌어야 할까?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하는 자리조차 귀찮아진다면, 균형추의 반대 방향으로 조금 넘어간 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중앙처리장치(CPU)의 발전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다. 처음 멀티코어를 만들 때는 모든 코어가 똑같았다. 듀얼코어는 똑같은 코어가 2개 합쳐진 형태였다. 따라서 모든 프로그램이 같은 구조의 중앙처리장치를 사용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ARM에서 빅리틀 구조(big.LITTLE architecture)를 선보인 것이다.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코어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각 프로그램이 최적의 코어에서 실행된다. 어떤 기술이 제품으로 나왔다는 말은, 이미 수많은 관련 논문들이 나왔음을 의미한다. 훨씬 많은 종류의 코어들을 함께 탑재한다거나[3], 코어 자체가 변신을 해가면서 프로그램에 맞춰간다거나[4], 아예 특정 프로그램을 위한 구조를 가지기도 한다.[5]

어쨌거나 세게 말할 순 없었다. 웃으며 말하고 넘어가버렸다. 얼마 전에 느꼈던 대로, 단지 내가 꼰대일 수도 있으니까.[6] 그리고 국현이가 틀리고 내가 옳은 것이라 해도, 국현이가 내 말 한 마디에 바뀔 것도 아니니까. 애써 변화시킨들, 내가 얻을 것도 별로 없으니까. 이쯤 되면 누가 더 ‘개인적인’ 것인지가 좀 헷갈리긴 하다.

사실 나도 부담스럽다.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일까, 연차가 쌓여서일까.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는 게 두렵다. 그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하기가 귀찮다. 피곤하다. 그냥 있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졸업이나 하게. 어차피 연구는 다른 선배에게 배우는 게 나을 테니까.

후 5시 40분, 주성이가 문을 벌컥 연다.

하주성(박1): 자자, 신입생 환영회 갑시다!

김국현(박3):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주성(박1): 뭘 그리 또 열심히 하실라구. 일단 신입생은 화끈하게 환영해주고 나서 해요.

김국현(박3): 야, 나 이 실험만 돌려놓고 나갈게. 먼저 가라.

하주성(박1): 아따, 이 형, 되게 열심이네. 근데 원식이 형은 없어요?

김정원(박4):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하주성(박1): 흠. 뭐, 일단 가죠. 알아서 오든가 말든가 하겠지.

김정원(박4): 교수님은?

하주성(박1): 집에 들렀다가 고깃집으로 바로 오신대요. 먼저 가요.

1층으로 내려가니 모르는 얼굴이 둘 있다. 주성이를 보고 서로 눈치를 보더니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쟤가 연정이란 앤가. 예쁘긴 하네. 왕년에 공대 아름이[7] 역할 좀 했겠다. 근데 내 스타일이 아니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인상이 좀 그렇다. 숙제나 프로젝트가 있으면 오빠들 꽤나 찾아다녔을 것 같다. 잘못 친해지면 호구되겠다.

저 남자 애는 이름이 뭐랬지? 어쨌든 사람이 착실착실하니 성실성실하니 생겼다. 좀 말랐고. 피부가 돌하르방 같은 게 학부 때 밤 깨나 샌 모양이군. 뭔가 맘에 든다. 그냥 느낌이.

대충 인사하고 출발했다. 학과 건물에서 고기 집까지는 15분쯤 걸으면 된다. 재학생들이 삼삼오오 앞에 가고, 신입생 둘이 약간 뒤에서 따라왔다. 석사 동기이긴 하지만, 그리 친해보이진 않았다. 주성이만 이따금씩 신입생들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어색어색하게 답한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어색해할 신입생들과 함께 가면서 이런 저런 농담이라도 할 텐데. 이젠 귀찮다. 어차피 이따 술자리에서 인사할 텐데 뭐.

기 집에 도착하니 테이블 세 개에 불판과 반찬들, 그리고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씩이 차려져 있다.

심정길(박3): 이야, 우리 이제 테이블 세 개 잡는 거야?

하주성(박1): 신입생 2명 포함하면, 이제 10명이거든요.

심정길(박3): 많다, 많어. 그럼, 저, 신입생들이 여기 앉으세요.

정길이 형이 가운데 테이블의 두 자리를 가리킨다. 교수님이 앉으실 자리의 맞은편이다. 오늘의 주인공이니까.

이제 치열한 영역 다툼이 시작된다. 서로 눈치로 자신의 연차와 나이 등등을 신호로 보내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좋은 자리란 무조건 교수님과 먼 자리이다. 교수님과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술을 한 잔이라도 더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신입생 환영회는 평소보다 더욱 피 튀기는 전쟁터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교수님을 대신해 신입생들과 술잔을 기울일 장수로 임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하주성(박1): 정원이 형, 여기 명당자리 앉으시죠.

비워둔 교수님 자리 바로 옆을 가리킨다. 이 자리는 술도 술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고기 굽기도 전담해야 하는 자리다.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에서 술잔 받으랴, 질문에 답하랴 정신없을 신입생들에게 고기마저 구우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김정원(박4): 야, 거긴 연구실 대표인 네가 앉아야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하주성(박1): 형님이, 저보다 주량이 두세 배는 되잖아요.

김정원(박4): 넌 이럴 때만 형님이냐? 거기 앉아 고기나 구워.

하주성(박1): 알았어요. 그럼 여기! 제 옆자리 앉으시죠. 제가 마시는 만큼 마시는 거예요.

교수님과 한 자리 떨어진 자리를 가리킨다. 교수님 시선의 사각지대다. 어차피 멀어봤자 한 테이블 거리니, 이런 자리가 오히려 명당이다.

나머지들도 자리를 잡았다. 보영이는 새로 온 남학생의 옆 자리에 앉았다. 길영이가 여자 신입생 옆 자리, 정길이 형은 내 옆 자리, 국현이도 교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간단히 말해서, 연차가 올라갈수록 교수님과 떨어져 앉았다.

딱 한 명, 준상이만 예외다. 교수님의 반대편 옆 자리에 앉는다. 고기를 구울 필요까지는 없는 자리지만, 맨 몸으로 사자굴에 뛰어드는 격이다. 학위논문심사가 그리 멀지 않은 까닭이다. 교수님과 교감이 한 번이라도 더 있는 게 좋으니까.

하주성(박1): 사장님, 여기 맥주는 치워주시고요, 소주 한 병씩 더 주세요.

강준상(박4): 야, 맥주 마시면 안 돼?

하주성(박1): 형, 신입생 환영회잖아요. 교수님 오셨을 때 맥주병이 존재하는 순간 소맥 말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럴 바에야 순수하게 소주 마시는 게 낫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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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바뀌면서 또 하나 바뀐 게 있다면, 바로 술 문화다. 내가 석사 과정 때만 해도 일주일이 멀다하고 폭음을 일삼았다. 1차는 당연, 2차는 필수, 3차는 기본, 4차쯤 돼야 선택이었다. 요즘은 폭음은 고사하고, 술자리 자체가 한 달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다. 그나마 1차면 절반이 사라지고 2차면 마무리 된다. 하긴, 삼성에서도 119운동(1차까지만, 1가지 술로만, 9시 전까지만)을 한다더라.[8]

하지만 여전히 신입생 환영회는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야, 신입생들의 주량을 측정하여 차후 회식 때 적정량의 술만을 권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냥 어색하니까 술이라도 진탕 먹는 거지 뭐.

왜 친해지려는데 술을 마실까? 사실 이건 우리 연구실만의 문화가 아니다. 학과 행사나 동아리 모임에서도 처음 인사하는 자리는 곧잘 술자리로 이어지곤 한다.

한 책에서는 “술은 양쪽을 카오스 상태에서 개방시키고 화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잘 열지 않기도 한다”[9]라고 했다. 술은 함께한 사람들을 혼돈의 상태로 밀어 넣어, 서로의 내면을 강제적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데 익숙한 나이가 되고 나면, 술의 힘이라도 빌어야 마음을 열 수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효용이 크지는 않다. 술이 깨고 혼돈의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어색해진다. 해장을 핑계로 한 번 더 만날 수도 있겠지만, 겨우 간밤의 술자리를 복기하며 이따금씩 끊어진 기억들을 조각모음 해볼 뿐이다. 술 마시는 도중에 말을 놓기로 했던 것은 1순위 후회감이다. 말 붙이기만 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처음 만나는 사이의 이 어색함은 술이 아니고서는 견뎌낼 수 없기에, 오늘은 술을 마실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합심하여 어색함을 선택한다. 교수님이 오시면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우리끼리 먼저 전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신입생들은 지금 이 순간이 더할 수 없이 어색하여 술이라도 마시고 싶을 테지만, 아무도 응대하지 않는다.

시 뒤, 교수님이 고기 집 입구에 등장했다. 정길이 형을 필두로 모두가 기립한다. 신입생들이 얼떨결에 따라 일어난다. 교수님이 가까이 오자 따로따로 인사를 한다. 교수님이 비어 있는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서, “그래, 앉자”하시자, 그제야 앉는다.

권대성(교수): 음, 이한길, 서연정, 맞지?

이한길(석1), 서연정(석1): 네.

권대성(교수): 여기, 고기는 시켰냐?

하주성(박1): 교수님 오시면 시키려고 했습니다. 사장님! 여기 테이블당 삼겹살 4인분씩 주세요,

권대성(교수): 그래, 어, 일단 한 잔씩 받지.

교수님이 소주를 한 잔씩 따르신다. 입 밖으로 꺼낼 것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입을 채울 것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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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심코 읽어보면 엄청 잔인한(?) 간판으로 유명하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data&no=903886

[2]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 8화 <또 하나의 입시> http://scienceon.hani.co.kr/173132

[3] 다음 논문에서는 다양한 구조의 중앙처리장치(CPU)를 쉽게 디자인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한다. Niket K. Choudhary, et. al. “FabScalar: composing synthesizable RTL designs of arbitrary cores within a canonical superscalar template.” ISCA ’11. 또, 몇 가지 종류의 코어가 있어야 최적인가에 대해 연구한 논문도 있다. Marisabel Guevara, et. al. “Navigating heterogeneous processors with market mechanisms.” HPCA ’13.

[4] 실행되는 프로그램의 조합에 따라 설정을 바꾸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는 많은 종류가 제시되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Engin Ipek, et. al. “Core fusion: accommodating software diversity in chip multiprocessors.” ISCA ’07; Paula Petrica, et. al. “Flicker: a dynamically adaptive architecture for power limited multicore systems.” ISCA ’13 ; Yuya Kora, et. al. “MLP-aware dynamic instruction window resizing for adaptively exploiting both ILP and MLP.” MICRO-46.

[5] 다음 논문은 안드로이드 플랫폼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능들을 빠르게 하기 위한 중앙처리장치(CPU) 구조를 제안한다. Nathan Goulding, el. al. “GreenDroid: A Mobile Application Processor for a Future of Dark Silicon.”HotChips. 2010. 또, 웹서버 등의 프로그램만을 위한 중앙처리장치(CPU) 구조를 제안한 논문도 있다. Pejman Lotfi-Kamran, et al. “Scale-out processors.” ISCA ’12.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 13화 <꼰대> http://scienceon.hani.co.kr/191353

[7] 공대 아름이: 공대에는 여학생이 매우 희귀하다. 기계과 등에서는 특정 학번에 여학생이 한두 명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이런 희귀한 여학생을 가리키는 용어.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나오면서 유명해졌다.http://www.youtube.com/watch?v=wnPNsoWMukQ

[8] 곽정수 기자, “119, 222, 112 송년회…기업 60%가 절주 캠페인”, 한겨레.http://www.hani.co.kr/arti/economy/working/614729.html

[9] 최규창 저,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강 같은 평화 출판, 84쪽

   ■ 작가의 말

얼마 전에 한 선배를 만났어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같은 학교 다른 학과의 어느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분이죠. 연구실에 있으니까 연구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조금씩 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자기에게서 자기 지도교수님의 모습이 보이더래요. 급한 성격에, 강하게 지적하는 말투도 따라하고 있더래요.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모습들을요.

한 친구는 예전에 학회에 갔다가 자기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님을 만났대요. 그런데 그 분이 자기 지도교수님이 평소에 하던 독특한 제스처를 그대로 하시더래요. 자기 지도교수님의 제스처가 그 분에게서 온 거였던 거죠. 그 만남 후부터는 그 제스처를 거의 안 하신다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느덧 따라하고 있는 지도교수님의 모습 없나요? 대다수의 교수님들이 좋은 모습들도 많이, 많이 가지고 계실 테니, 취사선택해서 닮아봅시다.

P.S. 오늘 삽화에 등장하는 견우와 직녀 캐릭터는 카이스트 화학과 박사과정인 박지영씨가 그려주셨습니다. 제 십년지기 친구이기도 하죠. 캐릭터 정말 예쁘죠?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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